3. 도망자와 프리티우먼
눈 안쪽에 모래가 서걱거리는 느낌이다.
4월 말이 다 되어가지만 내 불면증은 아직 나아지지 않았고 여전히 입안도 까끌까끌한게..
외삼촌 댁에 갔다와서 밀린 수업 따라잡고 1주일 후 시험기간까지 겹치는 바람에 눈밑과 피부에는 파르라니 푸른 빛까지 도는 느낌이다.
원래 화장도 안하던 애였던지라.. 화장으로 덮으면 우스울거 같아서 그냥 여전히 봄탄다는 핑계로 선배들 친구들의 관심을 돌려놓고 있었다.
확실히 먹는 양이 줄어서 그런지 몸무게가 좀 빠진 느낌이다.
바지가 맞는게 하나도 없는게.. 왠지 웃음이 났다.
머릿속이랑 마음은 어느정도 정리가 된거 같은데..
그것도 아니었던건지.. 몸이 아직 적응을 못한건지.. 살이 이렇게 빠지니..
정말 남들이 말하는 "실연"이라는걸 이제야 겪는거 같네..
아직 대부분의 대학원 사람들에게는 나는 "남친"이 있는 영현이다.
딱히 말을 안하려고 안한건 아닌데.. 물어보지 않으니 말하지 않았고 어쩌다보니 우현선배만 알게된 셈이랄까? 우린 새벽친구니까..
오늘은 4살위 사촌 오빠가 학교근처로 오기로 했다.
아빠 돌아가신뒤 재혼한 엄마는 새아버지가 외국으로 발령이 나셔서 지금 영국에 계시는지라 짬짬히 나랑 제일 친한 이모네 큰오빠에게 내 안부를 물어보는거 같다.
같이 바로 영국으로 가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자는 엄마와 새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한국에 남아버린 뒤로 엄마는 이모를 들들 볶아서 이모가 오빠에게 명령을 내리게 만든다.
그게 아니라면 레지던트 생활에 바쁜 인간이 오프라고 동생을 찾아와서 챙기기가 어디 쉬울까?
하여튼 오늘 내 꼴을 보면 오늘은 꼼짝 없이 잡혀서 이모네로 끌려 가던지.. 아니면 오빠에게 다 털어놓을때까지 시달릴 듯...
주섬주섬 연구실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도망자! 오늘 일찍 가냐?"
"네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 일찍 나와서 답안지 채점좀 했으면 좋겠는데"
"네 그럴게요"
"그래 그때처럼 무단으로 도망가는거 아니지?"
아.. 일주일 잠수가 생각보다 오래 가는구나....그게 벌써 3주 전인데... 그날 이후로 도망자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애써짜증을 감추며 연구실 제일 고참인 박사 3학기 선배에게 싹싹한 영현씨 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절대 아니라고 맹세 해 준뒤 연구실을 나왔다.
"아.. 오늘 첩첩 산중이로세"
혼자 중얼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3층 연구실에서 나오던 우현오빠와 딱 마주쳤다
"오빠!"
역시나 말없기로 유명한 우현오빠는 나를 바라보면서 남들이 보면 잘 알아채지 못할 미소를 머금었다.
"후훗 저 먼저 갑니다"
" 데이트 가니?"
"ㅋㅋㅋ 데이트라면 데이트지요. 사촌오빠가 이 근처에 와있다네요"
"또 갔다가 안오는거 아니지?"
"아.. 오빠까지 왜그래요! 갔다와서 중간고사도 다 치고 이미 끝난 일인데 다들 오늘 도망자타령이구만 으휴.."
"아.. 누가 또 그래?"
"울방 박선배요.아씨.. 오늘 금요일이라서 그런가.. 저 이제 땡땡이 안쳐요"
"그래.. 담주에 보자"
"아.. 저는 내일도 학교와야해요 채점하러. 아.. 날씨도 좋은데. 이런 주말에 학교를 와야하다니.."
"내일 학교오면 커피나 한잔하자"
"선배도 내일 학교 와요? 왜요?"
"나 코딩하던거 내일 밤까지 보내야 해서"
"아... 동지가 생겼네. 엇 전화온다. 저 갈게요!"
"그래"
역시나 담담한 우현오빠를 뒤로한 채 얼릉 뛰어서 잔소리꾼을 만나러 향했다.
아.. 우현선배는 말이 조금만 더 많아도 여자가 많이 따를텐데..
키와 마스크에 비해서 너무 무뚝뚝하단 말이지..
메신져에서 이야기 할때는 그래도 좀 대화가 길게 이어지던데 말이야...
저기 멀리서 기럭지라면 지지 않을 한 인간이 계속 전화기를 보면서 구시렁 거리고 있었다.
"오빠 미안미안 오다가 선배를 좀 만나서 말이야"
"너는 이몸이 황금같은 오프에 너를 만나러 오면...... 너 얼굴이 왜이래?"
"뭐가?"
"어디 아픈건가? 왜이렇게 축난 얼굴이냐고?"
"아.. 오빠 왜 화를 내고 그러슈? 얼릉 차에 타십시다.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 많은데야 얼릉 차 빼"
"너..일단 타서 이야기 하자"
나는.. 그날 오빠에게 지난겨울부터 지난달 3월까지 있었던 .. 어쩌면 별일 아닌.. 남들도 다 겪었을 법한 일들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나를 절대적으로 아껴주는 사람앞에서 너무 오랜만에 감정적인 문제를 털어놓다보니.. 눈물이 괜히 나서.. 이야기 하는 중간중간에 눈물도 났다.
생각해보니 헤어지면서 한번도 울지 않았던거 같았는데..
왠지 울면서 털어놓으니 후련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텅 비워지는 느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뒤 오빠는 나를 백화점으로 끌고갔다.
"야 너 옷 싸이즈도 안맞는다며 오늘 옷좀 사"
"아씨 오빠 나 돈 있어 뭐하는 거야?"
"걍 사라면 사 나중에 내 옷한벌 사주던가"
"아놔.. 귀찮다고!!"
"너 바지 너무 커서 안예쁘다 그래가지고 어디 다른남자가 붙겠냐?"
"........."
"이왕 빠진거 살 다시 안찌게 이참에 새걸로 사둬. 사준다고 했을때 사두지?"
"..........................히유...."
"이싸이즈 유지하면 딱 좋겠구먼. 걍 이싸이즈로 가는거야!"
그래서 결국 지금.. 나는 친척판 프리티우먼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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